조선 왕조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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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 때문에 친영제는 오히려 양반층에서 더욱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같은 불협화음을 해결하고자 남귀여가 혼속과 절충된 ‘반친영’이란 것이 오랫동안 결혼풍속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반친영이란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러 온 오랜 관행은 인정하되, 다음날(또는 3일후) 또는 길게는 1년 후에 신랑집으로 와서 신부가 시부모에게 인사를 올리도록 하는 방식이다. 지금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조선초기까지도 ‘며느리가 시부모 얼굴도 못보는 형편이다’고 한탄할 정도로 처가살이는 쉽게 청산되지 못했다. 친영제는 신부가 신랑집에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이른바 ‘시집살이’를 바탕으로 한 혼속이었다.


무신이 천대받고 무과는 사실상 존재하지도 않았던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무과가 시행되었다. 무과는 문과에 비해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들고 부담이 덜했기에 몰락 양반이나 상민들도 인생역전을 꿈꾸고 응시하는 일이 많았다. 과거제도는 능력을 통해 인재를 선발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처음 시행된 고려시대에는 여러 문제점과 폐단이 따라 다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와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왕들의 모습 그리고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 등이 기록된 야사(野史)가 그 반쪽을 어느정도 매워주고 있습니다. 16세기에는 사림의 새로운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사서(史書)들이 개인적으로 편찬되어 주로 향촌 자제들을 위한 교재로 이용되었다.


1907년부터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였고, 경술국치 후 1911년에는 궁의 이름을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또 1926년에는 경복궁 흥례문 영역을 철거하여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었고, 1930년대에는 덕수궁 일부 전각을 헐어 공원으로 조성하는 등 크게 훼손시켰다. 광복 이후부터 훼손된 궁궐의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1983년에 창경원은 다시 원래 이름인 ‘창경궁’을 찾으며 복원공사를 진행하였고, 1995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여 경복궁 흥례문 영역을 복원하였다. 그 밖에 창덕궁, 덕수궁, 경복궁 등도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그가 전쟁에 참가한 것이 자신의 출세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 적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집주인은 유동지의 손자였는데, 유동지가 승선한 날을 기일로 삼아 제사 지내고 있었다. 두 명은 돌아와 화식(火食)주6을 하여 몇 년 만에 죽었으나, 유동지는 훔쳐온 경액을 조금씩 마셔 건강하게 200년 넘게 살았다. 고성에 원이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그를 불러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고구려(高句麗)는 기원전 37년에서 서기 668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지배한 고대 국가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훈강(비류수)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태종 때에 정비된 육조의 기능과 관제의 정립은 세종대와 세조대에 지속적으로 수정되면서 체계가 잡히다가 1485년(성종 16)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와 함께 공식적으로 완성되었다.


영조 28년(1752)에 시행된 이 균역법은 양역의 폐단으로 말미암아 양인층의 피역 저항이 강화되어 가던 상황에서 양인층을 안정시키고 국가재정을 확보한다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제정되었다. 한편 지난 17세기 붕당정치기에 있어서 지배계층은 士論의 확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의 근거를 삼았다. 그러나 19세기의 세도가문들은 정권의 장악과 유지의 중요한 기반을 국왕 또는 왕실의 권위에 두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두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어느 지점에서 달라진 것인지를 ‘위에서 아래로’의 시선으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상징적 의미 층위가 사라지거나 고상함의 결이 얇아진 것이지, 19세기의 시대적 변화가 엄청나서 정말 근대적 면모를 보여준 것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 두 작품도 스타일의 차원에선 여전히 전대 조선시대 애정소설과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국정 운영 과정에서 이전의 사례를 참고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실록의 해당 내용을 열람하기도 했다.


또한, 제릉과 후릉 이외에도 태조의 선조들의 왕릉들은 대부분 이들이 살았던 함길도(오늘날 함경도)에 있다. 태조의 4대조의 무덤들은 조선이 건국되고 난 뒤에 왕릉으로 추봉되었다. 1392년에 익조의 능호와 함께 4대조의 능호를 일괄하여 정했는데, 함경도의 조선왕릉은 같은 능침 공간에 조성되었어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과 같이 제각각 다른 능호를 사용하였다. 이 왕릉들은 모두 함경도의 함흥과 안변, 문주 등지에 있던 까닭에 통틀어서 ‘함길도 8릉’으로 불렀다.[75]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의 무덤이 태조를 거쳐 세종 대에까지 이장되어 왕릉의 형식으로 보수되었다고 하였다. 현재 함길도 8릉에 대한 현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사진도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가 찍은 사진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이와 함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일찍이 송에 가서 불교의 깊은 경지를 터득하고 돌아와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당시 동양의 불교문화를 집대성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후 고려의 4대 국왕인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경종 때는 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였고, 성종은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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